[음반 감상문/분석] 언니네 이발관 - 가장 보통의 존재
안녕하세요, 루두두입니다.
세상소리에 돌아오기까지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5월 15일에 야심찬 대학원 일기를 쓰려다 임시저장하고 오늘 다시 훑어보면서 너무 자소서 같은 글에 기겁하고 지워버렸는데요,
요즘 음악을 들을때 큰 흐름과 연결방식에 주목하여 듣고 있습니다.
긴 음악은 아무래도 교향곡이나 오페라 같이 클래식 음악에서 많이 찾을 수 있지만, 재즈와 팝 음악에도 긴 음악 형식이 있죠.
바로 음반이라는 형식입니다.
팝 음반의 경우 형식에 대한 이론이나 전통이 없어서 제작자들과 음악가들의 직관에 의존하고 현실이다보니 개별 곡은 좋아도 음반 전체로 들을 때 효과가 반감되는 경우가 많죠.
여기에 더해서 감상자들조차 흐름이 잘 설계된 음반을 듣고도 왜 좋은지 설명을 잘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보통 음악 평론가라는 사람들은 곡이나 음악가의 스타일, 예를 들어 곡의 장르가 무엇이고 전통적인 어법에 맞는지, 음악가의 스타일이 누구와 닮았는지, 얼마나 개성적인지 등에만 집중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가끔 가사에 예민한 작가들은 가사와 음악가의 삶을 연결지어서 해석하는 등의 일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음악을 듣는 것은 음악가의 삶을 알고 싶어서가 아니며, 다른 음악 연상하기 게임을 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오늘은 음악을 당장 귀에 들리는 것들을 기반으로 논의하고자합니다.
오늘의 예시 음반은 언니네 이발관의 '가장 보통의 존재'입니다.
가장 보통의 존재를 듣기에 앞서
솔직히 말하자면 The Beatles와 Pink Floyd로 록을 듣기 시작한 저는 한국 인디 록음악을 잘 모릅니다.
언니네 이발관 디스코그래피도 조금씩 알아가지만 결코 잘 알진 않습니다.
이 음반을 알게 된 것도 순전히 2000년대 한국 음반 중 최고라고 찬양하는 사람들 덕이지요.
그렇다고 이 음반을 제가 애청하는가?
그것도 아닙니다.
언니네 이발관의 제자리걸음하듯 맴도는 멜로디 스타일로 인해 몇몇 곡은 개인적으로 별로 선호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이 음반인가?
음반 단위의 큰 흐름이 잘 설계되었고, 여기에 배울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음반에서 일종의 '통일성'을 느낀다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함께 알아봅시다.
음악가의 스타일에 대한 개인적 호불호를 티내지 않고도 솜씨있게 잘 만들어진 음악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도 보이고 싶네요.
트랙리스트/듣기
음악이 보통 여러 독립적인 곡이나 악장으로 이루어져있을 때, 먼저 주목해야할 것은 각 곡의 상대적인 시간 길이입니다.
다른 곡들 중간에 낀 짧은 곡은 중요도가 작을 가능성이 크고, 다른 곡에 비해 긴 곡은 더 중요할 곡일 가능성이 크죠.
또한 첫 곡과 마지막 곡은 기억에 잘 남기 때문에 특별한 지위를 가집니다.
이 음반의 곡들은 대개 균등하게 4분에서 5분 정도의 길이를 가집니다.
굳이 뽑자면 첫 곡과 마지막 곡이 5분이 넘으면서 음반을 지탱하는 기둥 역할을 합니다.
그것보다 더 두드러지는 것은 3분보다도 짧은 7번 트랙이 되겠습니다.
6번 트랙도 4분보다 짧음으로써 다른 곡들에 비해 짧은 곡이군요.
후에 다시 설명하겠지만 짧은 이 곡들은 일종의 '간주'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음반의 강점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 음반의 탁월한 점을 묘사할 때 통일성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러나 통일성이라는 말은 적절한 표현이 아닙니다.
음반에 담긴 다양한 접근을 제대로 못 담는 표현이며, 통일성이 있다고 좋은 음악이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많은 경우 똑같은 노래 10번 수록한다고 음반이 더 좋아지지 않습니다.)
이 음반의 진짜 강점은 트랙들이 적합한 순서에 배치되어 설득력있게 다음 곡으로 넘어가는 것, 즉 뛰어난 '유기성'이라 할 수 있죠.
여기에 개별곡들이 그 자체로 완성도를 가지는 점과 각 곡마다 다른 특색이 있는 점 역시 큰 강점입니다.
이 특성들은 모두 상상력과 어느 정도의 작곡 솜씨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그럼 이 음반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는지 한번 살펴봅시다!
상세 분석
음반은 '가장 보통의 존재'라는 동명의 곡으로 시작합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음반에서 가장 긴 곡에다 첫 곡인만큼 청자들에게 매우 중요학 다가옵니다.
그러나 이 긴 시간에도 불구하고, 이 곡은 그 자체로는 불완전한 곡입니다.
첫째, 곡이 시작한 멜로디로 돌아오는 대신 전개가 된 상태에 머무릅니다.
보통 가요나 팝 음악은 2절까지 나온 뒤 흔히 브릿지라고 하는 음악적 변화를 한번 겪고 원래의 멜로디로 돌아와서 끝이 납니다.
원래의 멜로디로 돌아오는 것은 안정적으로 완결의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 곡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중간에 확 바뀐 분위기에서, 새로운 멜로디를 제시한 채로 곡이 마무리가 되게 됩니다.
아직 안정적으로 착륙하지 않은 기분이 들죠.
둘째, 곡이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끊겨버립니다.
이 기법은 The Beatles의 I Want You (She's So Heavy)에서 쓰이기 시작한 기법인데요,
음악이 결론지어지지 않은 느낌을 강하게 주는 기법입니다.
이 두 가지 이유를 통해 첫 곡은 음악적 관성과 의문점을 제시하며 다음 곡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앞으로의 음악적 풍부한 여정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겠죠.
다음 곡은 '너는 악마가 되어가고 있는가?'입니다.
BPM이 빨라 앞서 곡과 대조되는 이 곡은 통상적인 1절-2절-브릿지-재현-마무리 형태를 지닌다는 점에서도 첫 곡과 반대지점에 서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록 음반은 (Elvis Presley시절부터) 빠른 음악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런 연유로 전 이 곡이 실질적 첫 곡이고 1번 트랙은 거기에 붙은 긴 인트로라고 생각합니다.
이후에 올 음악 스타일도 이 2번 트랙들에 더 가깝죠.
2번 트랙은 페이드아웃과 함께 마무리 됩니다.
3번 트랙은 '아름다운 것'으로 이 음반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곡입니다.
느리고, 멜로디가 두드러지는 곡이죠.
멜로디가 좀 더 길게 전개되는 곡이며, 그에 맞게 앞서 곡들에 비해 화음도 풍부한 편입니다.
클래식 음악의 4악장 구조에서 선율미가 넘치는 느린 악장에 비유하여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번 트랙과 마찬가지로 페이드아웃으로 사라집니다.
마치 아직 의문에 대한 답을 못 구한 듯.
느린 악장이 지나면 가벼운 스케르초가 나오듯, 4번 트랙 '작은 마음'은 좀 더 가벼운 느낌을 줍니다.
보통 빠르기지만 활력이 넘치는 싱코페이션 리듬, 전반적으로 저음을 줄여 무거움을 덜어낸 소리 등이 그런 느낌에 기여를 합니다.
이 곡은 잼 형태의 연주곡으로 곡이 마무리되는데요,
1번 곡과 같이 예상치 못한 시점에 곡이 컷당합니다.
곡이 컷당한 긴장의 해소는 5번 트랙이 시작하면 풀리게 됩니다. 제목은 '의외의 사실'
좀 더 빠르고 힘이 찬 이 곡은 일반적인 록 밴드 외의 악기가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트럼펫)
이 곡의 분위기와 4번 트랙과의 연결방식을 생각하면 음반을 마무리 짓는 전통적인 피날레 느낌을 줍니다.
만약 이 음반이 1번부터 5번 트랙까지만 담긴 EP였다고 해도 충분히 설득력 있게 들릴 것입니다.
마치 1번 트랙의 의문이 어두움, 슬픔, 그리고 아이러니함을 지나고 나름의 정답을 찾고 마무리되는 스토리일 것입니다.
물론 아직 다섯 곡이나 더 남아있고, 가사적으로도 아직 해소와 거리가 먼 상태입니다.
음반이 절반쯤 지났는데 벌써 종결의 느낌이 날 때,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이전에 많은 음악가들이 바로 이 지점에서 또다른 1번 트랙을 삽입함으로써 음반을 '다시' 시작하곤 했습니다.
아주 전형적인 예시로 Pink Floyd의 'The Dark Side of The Moon'의 'Money'가 되겠습니다.
Speak To Me부터 The Great Gig in the Sky까지 쭉 연결되는 음악은 Money 직전에서 한번 끊기고, Money가 2부의 시작 역할을 하고 있죠.
당시에는 비닐판의 양면에 음악을 담아야해서 이런 2부 형식이 흔했습니다.
이후 2000년에 발매된 Radiohead의 Kid A와 같이 CD용 음반에도 이런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언니네 이발관은 어떻게 다음으로 이어갔을까요?
6번 트랙 '알리바이'은 5번과 트랙과 동일하게 심벌 타격으로 시작합니다.
강렬했던 5번 트랙과 대비되어 그렇게 느리지 않음에도 차분하게 들려오는데요,
다소 (음악 흐름상) 실망스러울 수도 있는 이 곡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바로 브릿지에서의 트럼펫 간주입니다.
이 트럼펫을 듣게 되는 순간 청자들은 5번과 6번 사이의 연관성을 바로 느끼게 됩니다.
즉 6번은 느리고 멜로디가 다소 약한 2부의 시작이 아닌 1부의 마무리인 5번의 연장선 상에 놓이게 되는 것이죠.
이 형태가 성공적인 이유는 트럼펫 소리가 5번 트랙에서 처음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5번 이전부터 트럼펫 소리가 널리 쓰였다면 트럼펫은 5번 곡만의 특색이 아닌 음반 전반의 특색이 되었을 것이고, 6번 곡은 피날레 이후 너무 늦게 등장한 트랙 중 하나로만 여겨졌을 것입니다.
이 6번이 7번으로 연결되는 것 역시 흥미롭습니다.
악기가 하나씩 빠지면서 보컬 혼자 외로이 노래하는 것으로 노래가 끝나는데요, 이는 곡이 확 끊어질 때와 같은 긴장효과를 줍니다.
차이점은 곡의 모멘텀이 서서히 줄어드는 효과가 함께 발생하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6번 곡을 이을 수 있는 곡은 '100년 동안의 진심'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쿠스틱 기타만으로 반주되는 느리고 고요한 곡이죠.
가사도 거의 없고 곡 길이도 짧습니다.
6번과 7번 곡, 특히 7번 곡은 전체 흐름에서 여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7번곡은 밴드 구성의 사운드를 벗어나는 극적인 효과를 주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청자의 집중력을 환기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다양하고 개성이 넘치는 1번부터 5번까지의 곡들에 집중력을 쏟아부은 감상자들이 조금 더 편안하게 들을 수 있는 구간인 셈입니다. 문장으로 치면 쉼표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조용한 7번 곡의 분위기를 통해 대비되는 느낌을 지닌 8번의 등장을 더 효과적으로 만들어준다는 것입니다.
8번 곡은 '인생은 금물'은 음반에 떠도는 아이러니함이 정점을 찍는 곡입니다.
다소 쌉쌀한 가사와 반대로 스카 리듬의 신나는 곡이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언니네 이발관은 분명 이 곡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을 것이고, 이 곡을 가장 극적으로 만들 수 있는 배치로 7번 뒤를 선택했을 것입니다.
이 곡 역시 페이드 아웃으로 마무리됩니다.
9번 곡은 '나는'이라는 곡입니다.
다시 조금 어둡고, 조용하고, 살짝 느려진 곡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음반의 열 곡 중 이 9번 곡이 사라진다고 해도 전반적으로 큰 차이를 못 느낄 것 같습니다.
멜로디가 강하지도 않고, 편곡 상 특색이 두드러지지도 않은 것 같고 트랙리스트 상에서도 역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같은 위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아무래도 가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 위치에 놓인 것 같습니다.
악기들이 또 하나씩 빠지면서 기타 코드 종지로 음악이 끝이 납니다.
만약 이렇게 음악이 끝났다면 Radiohead처럼 조용한 음악으로 끝나는 형태가 되었겠죠.
그것도 결코 나쁜 선택지는 아닙니다만 이 밴드는 좀 더 만족스러운 결말을 준비해왔습니다.
음반에서 두 번째로 긴 곡이자 진짜 피날레인 10번 곡은 '산들산들'로 조용하고, 느린 점에서 9번과 유사하지만 이번에는 장조이며 아주 밝은 느낌을 줍니다.
가사적으로는 클라이막스였던 5번과 8번과 같이 역설적인 느낌을 주는데 음반 전체의 가사적 테마를 잘 요약해주고 있습니다.
음악적으로는 1번 곡의 의문이 마치 해소되는 기분을 주는데요, 클래식 음악에서 단조 음악이 장조 악장으로 해소되는 것과 유사한 쾌감을 줍니다.
이 곡에서 가장 놀라운 부분 중 하나는 5번 6번에서 쓰였던 트럼펫 소리가 돌아온 점입니다. (트럼펫의 자연스러운 음역보다는 많이 낮습니다.)
마치 떡밥이 회수되는 그런 기분이죠.
아마 이런 점에서 얼핏 '통일감'의 인상을 느낄 수도 있겠습니다.
앞서 있던 다른 몇몇 곡처럼 악기들이 하나씩 빠지며 피아노만 외로이 남긴 채로 곡이 끝납니다.
결론
'가장 보통의 존재'에 효과적으로 음악적 유기성을 주는 요소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곡의 아웃트로의 전환부로서의 활용 (1, 4, 6, 9)
2. 곡들간의 적절한 대조 효과 (1-2, 2-3, 4-5, 7-8, 9-10)
3. 쉬어가는 구간 조성 (6-7번 트랙)
4. 적절한 음악적 떡밥 회수 (10번의 트럼펫)
이러한 요소들은 차후 제 작곡에도 활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음악에서 큰 그림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이번 계기에 처음 해봐서 다소 횡설수설하는 감이 있긴 한데요,
다음 글부터는 개선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